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문단 편집) === 맥거번 캠페인의 폭발 === 이에 대항해 [[리처드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상대방 진영을 도감청하는 것도 서슴치 않으며]] 맥거번의 캠페인을 침몰시키고자 하였다. 이때 나온 유명한 구호가 '''Amnesty, Abortion, Acid'''로, 조지 맥거번이 당선되면 즉각적으로 베트남전쟁 기피자 사면, 낙태 합법화, 마약 합법화[* Acid는 은어로 [[LSD]]를 가리킨다.]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뜻의 네거티브 구호였다. 더구나 조지 맥거번의 핵심 공약과 얼추 비슷한 것이었기에[* 하지만 핵심적인 부분은 차이가 났고 급진적인 것이 아니었다. 마리화나 스탠스는 비범죄화나 처벌 완화 수준이었고[* 진짜로 합법화를 주장했던 것은 윌리엄 F. 버클리(!)였다.] 낙태는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로 결정난 것과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 [[마이클 두카키스|맥거번은 이에 대한 적극적인 반박을 하지 않았고,]] 많은 락스타들과 연예인의 맥거번 지지 선언은 닉슨의 흑색선전을 일리있게 만들었다. 특히 북베트남을 방문해 베트콩 지지 선언을 한 [[제인 폰다]]가 맥거번을 지지하고, 북베트남 정부마저 "맥거번의 당선 여부를 살피며 협상에 임하겠다"라고 포고해 맥거번은 졸지에 친북베트남, 친마약 후보로 이미지가 씌워져버렸다. 당연히 미국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중산층 투표 계층은 겁에 질려 닉슨 지지로 단결하였다. 이 구호는 닉슨이 처음 만든 것이 아니라, 맥거번에 반대하던 민주당 보수파가 처음 만들었고 이를 닉슨이 차용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놀랍게도 후속 연구에 따르면 '''이 구호를 처음 사용해 퍼트린 것은 맥거번의 러닝메이트였던 토머스 이글턴 상원의원이었다고 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톰 이글턴.jpg|width=100%]]}}} || || '''맥거번 캠페인을 폭파시킨 이글턴 부통령 후보''' || 맥거번에 있어 결정타는 1972년 8월 토머스 이글턴의 부통령 후보 사퇴였다. 토머스 이글턴은 본래 맥거번과 별로 관계도 없는 민주당 보수파였지만 이글턴을 제외한 모든 부통령 후보군이 부통령 지명을 거부해 얼떨결에 부통령 후보가 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글턴은 원래 맥거번을 매우 반대하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적극적인 선거전에 나서지 않았다. 그러던 1972년 8월, 토머스 이글턴이 과거 우울증과 관련된 정신 질환으로 전기 치료까지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지금은 [[우울증]]과 정신질환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개선되었지만, 당시는 장애인 혐오가 만연하던 시절이었고 무엇보다 토머스 이글턴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부통령 직을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있냐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정작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현대 역사가들이 꼽는 가장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대통령임을 생각한다면 아이러니하다.] >'''조지 맥거번은 토머스 이글턴을 1,000% 지지합니다.''' >---- >[[조지 맥거번]]의 대변인이 낸 성명. '''이 발언 6일 후 이글턴은 후보직을 사퇴한다.''' [[조지 맥거번]]은 이 논란이 말도 안되는 닉슨 측의 음해라고 주장하며 이글턴을 '''1,000 퍼센트'''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1,000%"라는 과장된 수치 때문에 오히려 대중들은 맥거번이 쩔쩔매며 사실을 은폐하는게 아니냐는 시선을 보냈다. 결국, 일주일도 안가 이글턴은 후보직을 사퇴해버렸으며 맥거번은 수세에 몰렸다. 맥거번 캠프는 선거운동 중간이 부통령 후보를 바꾸는 초유의 상황에 내몰렸다. 맥거번은 급한 불을 끄기 위해 [[휴버트 험프리]]에게 러닝메이트가 되달라고 요청했지만 험프리는 단칼에 거절했다. [[에드먼드 머스키]] 역시 거부했다. 결과적으로 약체인 서전트 슈라이버 전 프랑스 대사[* 케네디 가문의 일원이었다. 케네디 가문만큼은 끝까지 맥거번을 지지했기 때문이다.]가 맥거번의 부통령 후보로 지명된다. 이 소란 이후 맥거번의 지지율은 '''20%대 후반~30%대 초반'''까지 떨어졌고 반대로 닉슨의 지지율은 '''60%대 중후반'''으로 올라가 양 후보간 지지율 격차가 '''35~40%p'''격차로 벌어지는 암담한 상황이 펼쳐진다. 물론 조지 맥거번이 닉슨의 네거티브에 가만히 있던 것은 아니었다. 조지 맥거번은 [[베트남 전쟁]] 문제를 집요하게 공격하며, 북위 17도선 이북의 베트남 폭격이 불필요한 전쟁 범죄라고 규정했다. 또한 [[헨리 키신저]] 장관의 캄보디아 폭격 문제를 두고 "반인도적"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논조는 당시 대학생 청년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퍼져있던 문제 인식이었으므로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조지 맥거번은 리처드 닉슨을 '''히틀러'''라고 과장되게 비유하면서 중도 유권자들에게 역효과를 낸데다, 호치민을 '''조지 워싱턴'''에 비유하고, 베트콩을 공식 지지한 [[제인 폰다]]에게 지원을 받는 등 삽질을 거듭해 자기 자신을 친공산주의 후보로 이미지 메이킹 하고야 만다(...). 또, 베트남에서 90일만에 철수하겠다는 그의 공약은 좌파 진영에서도 전혀 비현실적인 공약이라며 비판받았고, 그러면서 유럽에서 미군을 완전히 철수하지 않겠다는 것은 유럽에 기반을 두고 있는 유대계 미국인 유권자들 눈치를 보는게 아니냐는[* 유대인은 그때나 지금이나 민주당의 가장 큰 지지 기반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닉슨은 (키신저와의 관계와는 별개로) 극렬한 반유대주의자였다.]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맥거번 캠프는 자금 부족, 인력 부족, 전략가 부족의 3중고에 시달렸으며, 이로 인하여 지속적으로 미숙한 캠페인을 운영하게 된다. 한번은 30분짜리 정견 발표 광고를 냈는데, 하필이면 북미 최고의 인기 시리즈인 [[스타트렉]]의 방영 시간대에 광고를 방영하기로 해서 스타트렉 방영이 취소되고 대신 광고가 방영되는 참사(...)가 일어나, 격노한 스타트렉 팬들이 닉슨을 지지했다는 얘기도 있다. 또 [[휴버트 험프리]] 상원 의원과 함께 진행한 "시민과의 인터뷰"에서는 한 여성 닉슨 지지자가 맥거번을 집요하게 공격하자 참을성을 잃고 고함을 지르며 유권자를 다그치는 등[* 원래 맥거번은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유명했다.] 온갖 실책과 실수가 반복되었다. 결정적으로 [[닉슨]]은 1968년 선거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약점인 '''TV 토론을 거부했다.''' 맥거번은 차이를 좁히지 못했고 크게 여론조사에서 뒤쳐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